아이와 강아지는 너 눈에만 이쁘다

타인에게 자기 사랑을 강요하는 부모에 대하여

안승원 · Wonbrand 대표 · 2026년 4월 29일


1. 시작하며 — 그 한 문장이 가리키는 것

"아이와 강아지는 너 눈에만 이쁘다."

이 한 문장은 사실 한 사람을 비난하는 말이 아니다. 한 시대의 풍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카페에서 아이가 다른 손님의 다리에 부딪혀도 사과하지 않는 부모, 강아지가 행인을 향해 짖는데 "사람을 좋아해서 그래요"라고 웃는 견주, 식당에서 옆 테이블 음식 위로 아이가 손을 뻗는데 "호기심이 많아요"라고 자랑스러워하는 부모.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은 것은, 그것이 단지 한두 사람의 매너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가 자녀 양육을 어떻게 다시 정의했는지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런 부모를 야단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하려는 글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를 짚으려 한다. '내 아이가 이쁘다'는 사실이 '타인도 내 아이를 이뻐해야 한다'로 미끄러지는 그 순간에, 사적인 사랑이 공적인 강요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강요는 자녀에게도 결국 손해라는 것이다.

이 글은 부모의 잘못이 아니라 부모가 놓인 자리를 들여다보려 한다. 자기 사랑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으면 이 험한 세상에서 내 아이를 보호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된 그 자리. 그 자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그 자리에 머물면 자녀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지가 이 글의 주제다. 결론부터 말하면, 자녀를 가장 사랑하는 길은 자녀를 자기 손에서 떨어뜨리는 일이다. 그것이 키움의 목적이고, 인류가 수만 년 동안 해 온 일이다.


2. 사랑이 어떻게 강요로 변하는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진화가 인간에게 새겨넣은 가장 오래된 회로 중 하나다. 문제는 그 사랑이 사회적 행위로 표현될 때 일어난다. 사랑은 사적인 감정이지만, 그 감정이 공공장소에서 행위가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사적이지 않다. 다른 사람의 시간과 공간과 안전과 부딪히기 때문이다.

이 부딪힘의 자리에서 부모는 두 갈래의 선택을 마주한다. 하나는 '내 사랑을 내 안에 두고, 타인의 영역에서는 자녀를 절제시키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내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타인도 내 자녀를 같은 강도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정하는' 길이다. 첫 번째 길이 양육이고, 두 번째 길이 강요다. 이 둘은 멀리서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정반대다.

강요로 미끄러진 사랑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일상의 장면으로 옮겨 보자. 카페에서 아이가 뛰어다니다 다른 손님의 의자를 넘어뜨린다. 강요의 자리에 있는 부모는 그 손님에게 사과하기 전에 아이를 안아 들고 "괜찮아, 다친 데 없지"라고 묻는다. 옆 테이블의 손님은 자기가 부딪힌 사람인데 한마디 사과를 받지 못한다. 화를 낼 수도 없다. 화를 내면 '아이한테 너무하다'는 시선이 자기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사회적 인식이 그 손님의 정당한 분노를 검열한다. 그래서 그는 침묵한다. 침묵이 쌓이면, 그것이 노키즈존이 된다.

이것은 작은 예다. 그런데 같은 구조가 다른 자리에서도 반복된다. 강아지에게 물린 적이 있는 사람도 카페의 강아지를 귀여워해야 한다. 임신을 잃은 적이 있는 사람도 친척 집에 갔을 때 아기에게 다정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사회적으로 거의 금지되어 있다. 부모는 "예쁘죠?"라고 묻고, 상대방은 "예뻐요"라고 답해야 한다. 답하지 않으면 그가 이상한 사람이 된다.

여기서 작동하는 구조의 이름이 '강요된 동의'다. 부모가 자기 사랑을 사회적 표준으로 격상시키는 순간, 그 사랑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잘못된 사람이 된다. 그리고 부모는 자기 자녀를 일종의 부적처럼 들고 다니게 된다. 자녀가 있다는 사실이 자기 행동의 면책 사유가 되고, 자녀의 존재가 타인의 양보를 받을 수 있는 마패가 된다. 식당에서 자리 옮겨 달라는 요구, 비행기에서 좌석 바꿔 달라는 요구, 회사에서 야근 빠지는 요구가 자녀 한 명의 존재로 정당화된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 어느 순간 자녀를 도구처럼 들고 다니는 모양으로 굳어진다.

이 변형의 비극은 부모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부모는 자기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믿고, 그 믿음은 진실이다. 다만 그 사랑이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공간으로 흘러넘치면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강요가 된다. 그리고 그 강요의 비용을 가장 많이 치르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자녀 본인이다.


3. 마을이 사라진 자리 — 인류가 본래 아이를 키운 방식

이 미끄러짐의 뿌리를 이해하려면 한 가지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류는 원래 한 부모가 한 자녀를 키우는 종이 아니었다.

미국의 진화인류학자 새라 흐디(Sarah Blaffer Hrdy)는 2009년의 저서 『어머니와 그 외의 사람들(Mothers and Others)』에서 인간을 '협동 번식자(cooperative breeder)'로 규정했다. 침팬지 어미는 자식을 거의 혼자 키운다. 자기 새끼를 다른 개체에게 절대 넘겨주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다르다. 인간 아기는 태어난 직후부터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다.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 사촌, 이웃의 어른들. 흐디는 이 보조 양육자들을 '대리 양육자(alloparent)'라고 불렀다.

이 사실의 무게는 구체적인 수치 안에 있다. 콩고 분지에 사는 에페족 사회의 신생아는 태어난 첫날 평균 14명의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긴다. 같은 지역의 바야카족 아기는 양육 행위의 약 40~50퍼센트가 부모가 아닌 사람들의 손에서 일어난다. 인류학적으로 보면, '엄마와 아기 둘만의 시간'이라는 풍경은 우리 종의 자연사적 표준이 아니다. 오히려 예외에 가깝다.

이 사실 위에서 흐디는 한 가지 계산을 제시한다. 인간의 아이 한 명이 독립할 때까지 필요한 칼로리는 약 1,300만 칼로리에 이른다. 부모 두 사람이 사냥과 채집으로 감당할 수 있는 양을 한참 초과하는 양이다. 인류 사회가 유지되려면, 부모가 아닌 누군가가 반드시 이 칼로리의 일부를 채워주어야 했다. 할머니, 사촌, 이웃, 마을 전체가 함께 채웠다. 인간이라는 종의 자녀는 한 부모의 자녀가 아니라 마을의 자녀였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은 인류학적 사실의 시적 요약이다.

여기서 짚어야 할 사실 하나가 있다. 마을이 자녀의 칼로리만 채운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마을은 자녀의 사회적 마찰을 채웠다. 또래 친구와 다투고, 옆집 할머니에게 야단맞고, 이웃 아저씨에게 도움받고, 친척 어른의 잔소리를 듣는 그 일상이 자녀를 사회적 존재로 빚어냈다. 부모가 모르는 사이에 자녀에게 일어난 수백 번의 작은 마찰이, 자녀를 부모의 아이에서 마을의 아이로 변형시켰다. 그리고 이 변형이 일어나야만 자녀는 결국 사회의 어른이 될 수 있었다.

이 마을이 지금 우리 곁에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200년 전부터 서서히 사라졌고, 한국에서는 60년 만에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빨려들어갔다. 3대 동거 가구는 단 한 세대 만에 핵가족 아파트로 대체되었다. 자녀의 양육에 참여하던 할머니, 이모, 사촌, 이웃의 어른들이 모두 자녀의 일상에서 빠져나갔다. 남은 것은 부모 두 사람과 자녀 한두 명이다.

여기에 자녀 수의 급감이 겹쳤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24년 잠정 0.75명까지 떨어졌다. 일본은 2023년 1.20명에서 47년째 비슷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대만은 0.87명, 싱가포르는 0.97명, 중국은 약 1.0명 안팎이다. 한 가정에 자녀가 한 명이거나 한 명도 없다. 부모가 가진 사랑의 양은 줄어들지 않았는데, 그 사랑을 받을 자녀의 수는 한 명으로 압축되었다. 한 자녀에게 두 부모의 100퍼센트와 네 조부모의 잔여 자원이 모두 몰린다. 사회학자들이 동아시아에서 관찰한 '4-2-1 구조'다. 조부모 네 명, 부모 두 명, 자녀 한 명. 이 구조에서 자녀 한 명이 받는 사랑의 밀도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다.

밀도가 너무 높으면 사랑은 변형된다. 적당한 양으로 분산되었을 때 자녀를 살리던 사랑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을 때는 자녀를 짓누른다. 그리고 그 압력의 한 갈래가 부모로 하여금 타인에게도 같은 강도의 사랑을 요구하게 만든다. 마을이 함께 키울 때는 누구도 강요할 필요가 없었다. 모두가 어느 정도씩 자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마을이 사라지고 부모 두 사람만 남으면, 부모는 자기 사랑이 마을 전체를 대신해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의 무게를 자녀와 타인에게 동시에 부과한다.


4. 동아시아의 가속 — 경쟁이 깊어질수록 보호가 두꺼워진다

핵가족화는 모든 산업화 사회가 겪는 일이다. 그런데 그 위에서 동아시아는 한 층을 더 쌓았다. 좁은 국토와 높은 인구밀도, 고학력 사회, 그리고 입시·취업의 극단적 경쟁이다. 이 세 조건이 결합하면서 자녀 한 명에게 몰리는 사랑이 곧 자녀 한 명을 둘러싼 보호로 변형되었다.

한국의 통계를 보자. 통계청과 교육부가 2025년 3월에 공동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4년 한국 초중고 사교육비 총액은 29조 2천억 원이다. 사교육 참여율은 처음으로 80퍼센트를 돌파했다. 같은 해에 정부가 시범 조사한 영유아 사교육비를 더하면 합계는 약 32조 원에 이른다. 영어유치원의 월평균 비용은 154만 5천 원으로 보고되었다. 의과대학 정원이 늘어난 후 학원가에는 '7세 의대 입시반'이 등장했다. 자녀의 미래를 향한 부모의 투자가 자녀의 일상으로 거의 전부 흘러들어가고 있다.

투자가 커질수록 보호도 두꺼워진다. 30년에 걸쳐 32조 원을 자녀에게 쏟아부은 부모는, 그 자녀가 자기 손을 떠난 자리에서 다치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이 손해의 감각이 부모를 자녀의 모든 마찰점에 개입시킨다. 학교에서 친구와 다투면 학교에 항의하고, 학원에서 점수가 낮으면 학원에 항의하고, 회사에서 자녀가 야단맞으면 회사에 항의한다. 자녀가 24세가 되어도 부모가 면접장 앞까지 따라오는 풍경이 이상하지 않은 사회가 되었다. 보호의 끝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이 보호가 학교 현장에서 어떻게 폭발했는지 가장 비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2023년의 서이초 사건이다. 같은 해 7월 서울 서이초등학교의 24세 신임 교사가 교내에서 사망했다. 49재인 9월 4일, 전국에서 약 10만 명의 교사가 모인 '공교육 멈춤의 날'이 열렸다. 이후 보도된 학부모 갑질 사례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교사가 수업 중 아이폰을 사용하지 않도록 요구한 사례, 교사 목소리가 거슬린다는 민원, 편식하는 학생에게 "이것도 한번 먹어 봐"라고 권유한 것이 아동학대로 신고된 사례. 어느 항목 하나도 자녀를 미워해서가 아니다. 자녀를 너무 사랑해서다. 너무 사랑해서, 자녀의 일상에 들어오는 모든 자극을 부모가 직접 통제하려 하면서, 결국 그 사랑의 비용을 한 젊은 교사의 생명이 치렀다.

이 사건 후 이른바 '교권 5법'이 통과되었지만, 통과 2년 후 한국교총의 설문조사에서 교사 79.3퍼센트가 학교 현장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답했다. 법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한 사랑을 사회적 강요로 옮기는 그 회로 자체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로가 그대로 있으면 법은 작동하지 않는다.

비슷한 풍경이 일본에 47년 전부터 있었다. 1979년 일본의 정신과 의사 구토쿠 시게모리(久徳重盛)가 『母原病(모원병) — 母親が原因でふえる子どもの異常』을 출간했다. 시리즈는 100만 부가 팔렸고, 중국어로도 번역되었다. 이 책은 어머니의 양육 방식이 자녀의 정신적·신체적 이상을 유발할 수 있다고 보았다. 47년이 지난 지금, 일본의 출산율은 47년째 1.20명대에 머무르고, 매년 등교거부 학생 수는 사상 최고를 갱신한다. 한 자녀에게 모든 사랑이 집중되는 구조의 결과가 한 세대를 지나 다음 세대까지 이어졌다.

중국은 더 극단적인 실험을 거쳤다. 1979년부터 2015년까지 36년간의 한 자녀 정책으로 약 1억 5천만 명의 외동 세대가 만들어졌다. 1980년대에 '소황제(小皇帝)'라고 불리던 그 세대가 자라서 2020년대에 자기 자신을 '동아시아 아이(東亞小孩)'라고 자조하기 시작했다. 한 자녀 정책은 폐지되었지만, 정책 폐지 후 출산율은 오르지 않고 더 떨어졌다. 한 명에게 사랑을 집중하는 회로가 한번 자리잡으면, 정책으로 풀리지 않는다. 회로 자체가 부모의 머릿속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5. 미국의 유리 정원 — 강한 보호와 약한 인간

동아시아만의 이야기일까. 그렇지 않다. 사랑의 강도가 보호로 변형되는 회로는 미국에서도 작동했다. 다만 형태가 달랐을 뿐이다.

미국에는 강한 아동보호법이 있다. 자녀에 대한 신체적 학대뿐 아니라 방치(neglect)도 형사 처벌 대상이다. 어린 자녀를 잠시라도 차에 두고 자리를 비우면 신고된다. 모르는 사이에 자녀가 길을 헤매면 부모가 추궁받는다. 이 법체계 자체는 자녀를 보호하기 위한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고, 실제로 많은 자녀를 보호해 왔다. 다만 한 가지 부작용이 있었다. 부모가 자녀의 일상에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사회의 다른 어른이 자녀의 일상에 개입할 통로가 거의 모두 막혔다는 점이다.

이 자리에 헬리콥터 양육이라는 미국식 변형이 들어왔다. 줄리 리스코트-하임스(Julie Lythcott-Haims)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2002년부터 2012년까지 10년간 신입생 학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가 그 자리에서 본 것은, 미국 최고의 대학에 막 입학한 18세 신입생이 식당에서 주문을 못 하고, 교수에게 메일을 못 쓰고, 룸메이트와의 사소한 갈등을 못 풀고, 그때마다 부모에게 전화를 거는 풍경이었다. 그는 이 풍경을 정리해서 2015년에 책 『How to Raise an Adult』를 펴냈다. 같은 해 TED 강연에서 그는 '체크리스트로 도배된 아동기(checklisted childhood)'라는 표현을 썼다. 부모가 자녀의 일과를 분 단위로 채워 넣고, 자녀가 그 체크리스트를 어른의 손길 아래에서 완수하면서 자라났다는 묘사였다.

학계도 같은 풍경을 확인했다. 2022년 'Frontiers in Psychology'에 발표된 메타리뷰는 헬리콥터 양육이 자녀의 우울과 불안에 일관된 양의 상관을 보인다고 보고했다. 자녀가 어른이 되어도 부모의 통제 아래에서 살아가는 그 구조가, 자녀의 정신 건강을 갉아먹고 있었다.

여기서 미국의 풍경과 한국의 풍경이 한 점에서 만난다. 강한 아동보호법이 자녀를 외부로부터 차단하면, 자녀의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낯선 어른의 야단'이 사라진다. 그리고 헬리콥터 양육이 자녀를 부모 안으로 끌어들이면, 자녀는 부모의 보호 안에 갇힌다. 두 힘이 함께 작동할 때, 자녀는 사실상 유리 정원 안에서 자라난다. 안전하지만, 바람이 닿지 않는다. 햇빛은 들어오지만, 진짜 햇빛은 아니다. 그리고 이 정원에서 자란 식물은, 정원 밖의 진짜 바람을 만나는 순간 흔들리지 않고 부러진다.


6. 마찰 없이 자란 신경계

마찰의 가치는 좀처럼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부모의 자연스러운 본능은 '자녀가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고, 마찰은 거의 정의상 작은 다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발달심리학의 누적된 연구는 한 가지를 일관되게 가리킨다. 작은 마찰을 거치지 않고 자란 신경계는 큰 마찰을 만났을 때 회복하지 못한다.

이 그림의 한쪽을 그린 것이 1995년부터 1997년에 걸쳐 진행된 미국 CDC와 카이저(Kaiser Permanente)의 ACE Study, 곧 '아동기 부정적 경험 연구'다. 이 연구는 학대, 방치, 가정 폭력 같은 강한 부정적 경험이 평생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큰 마찰은 분명히 자녀를 다치게 한다. 그 사실 자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림의 반대쪽이 있다. 강한 학대는 명백한 손해이지만, 적당한 강도의 도전이 부재한 환경 또한 다른 종류의 손해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임상심리학자 리처드 테데시(Richard Tedeschi)와 로런스 캘훈(Lawrence Calhoun)은 2004년 'Psychological Inquiry'에 발표한 논문에서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큰 마찰을 거친 사람의 일부는 단지 회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마찰 이전보다 더 깊은 자기를 갖게 된다는 관찰이었다. 그들은 자기 한계를 새로 알게 되고, 인간관계의 의미를 다시 보게 되고, 삶의 우선순위를 재정렬한다.

여기서 중요한 단서 하나를 짚어야 한다. 마찰 자체가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마찰을 이겨낸 경험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이 둘은 정확히 다른 일이다. 마찰을 그저 견디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다시 일어선 경험이 회로에 새겨져야, 그 경험이 다음 마찰 앞에서 작동한다. 그래서 적당한 강도의 마찰이 적당한 빈도로 누적되는 환경이 자녀에게 가장 좋다. 너무 약한 마찰은 회복 회로를 훈련시키지 못하고, 너무 강한 마찰은 회복 회로 자체를 부순다. 그 사이의 어딘가가 자녀에게 필요하고, 그 어딘가는 자녀의 일상 속 작은 다툼, 작은 실패, 작은 거절, 작은 무시에 들어 있다.

마을이 있던 시절에는 이 마찰이 자녀에게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친구와의 다툼, 사촌과의 비교, 옆집 할머니의 야단, 이웃 아저씨의 핀잔이 자녀의 일상을 채웠다. 부모가 보지 않는 자리에서 자녀는 자기 발로 작은 마찰을 거쳤고, 그때마다 회복 회로가 한 번씩 작동했다. 마을이 사라지고 부모 두 사람만 남은 환경에서,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자녀의 일상을 분 단위로 통제하는 환경에서, 이 작은 마찰은 거의 모두 차단된다. 부모의 사랑이 너무 강해서, 사랑의 결과로 마찰이 사라진다.

마찰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있는가. 한 번도 작은 거절을 받아 본 적 없는 사람이 처음 큰 거절을 받았을 때 일어나는 일이 있다. 한 번도 작은 실패를 경험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처음 큰 실패를 만났을 때 일어나는 일이 있다. 학계의 표현을 빌리면 '회복탄력성의 미발달'이지만, 일상의 표현을 빌리면 '한 번에 무너짐'이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이 끝내 자녀를 다치게 만드는 경로다. 부모는 자녀가 다치지 않기를 바랐는데, 정확히 그 바람 때문에 자녀의 회복 회로가 자라지 못했다. 그리고 부모의 손에서 떠나는 그 순간, 자녀는 작은 일에도 무너진다. 무엇 하나 혼자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하는 자리에 처음 서 있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고 싶다. 이 글의 앞선 에세이 「히키코모리: 집이 일터였던 시대」에서 짚었듯이, 방에 들어간 청년은 도망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준비가 길어지는 한 가지 이유는, 준비할 회로 자체가 그동안 자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마찰 없이 자란 신경계는 한 번의 충격에 무너지고, 무너진 후에 다시 일어서는 데 보통보다 훨씬 긴 시간이 든다. 부모의 보호가 이 시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보호가 사라지는 순간 그 시간을 보낼 사람은 자녀 본인이다.


7. 부딪히기는 폭력이다 — 정당화될 수 없는 한 가지

이쯤에서 한 가지 현상을 짚어야 한다. 일본의 '부딪히기(ぶつかり)'다. 사회 조사 회사 미디어시크(MediaSeek)가 2024년 11월에 실시한 설문에서, 응답자 21,758명 중 14퍼센트가 길에서 의도적인 부딪힘을 직접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고, 6퍼센트가 다른 사람이 당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답했다. 2025년 5월에는 후쿠오카에서 59세 부교수가 가방으로 행인을 가격해 체포되었고, 2026년 2월에는 시부야 횡단보도에서 한 중년 여성이 대만에서 온 관광객의 어린 딸을 부딪혀 쓰러뜨린 사건이 보도되며 '부딪히기 아줌마(ぶつかりおばさん)'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이 현상의 이미지가 처음 인터넷에 퍼진 것은 2018년 5월 신주쿠역의 영상이었다.

이 현상을 다룰 때 신중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이 글이 절대 하지 않으려는 일이다. 부딪히기를 어떤 사회적 기능으로 미화하지 않는 것이다. '메이와쿠(迷惑) 문화의 자정 작용'이라거나 '공공질서를 어지럽힌 자에 대한 사적 시정'이라는 식의 해석은, 부드럽게 들릴지 몰라도 결국 폭력을 정당화한다. 부딪히기는 폭력이다. 이 점에 어떤 단서나 우회로도 붙일 수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길에서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는 일은 일상적으로 일어나지만, 그것이 의도적인 가격으로 변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부주의가 아니라 가해다. 가해는 가해를 받는 사람의 동의가 없으면 폭력이고, 가해를 받는 사람이 영문 모르고 당했다면 더더욱 폭력이다. '저 사람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가해자의 내면 상태가 그 폭력을 면제해 주지 않는다. 부딪히는 사람에게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가하는 가격은, 어떤 문화적 맥락 안에서도 변호될 수 없다.

이 글이 부딪히기를 등장시키는 이유는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정반대의 이유에서다. 부모의 과보호가 만들어낸 자녀, 마찰 없이 자라서 자기 행동이 타인에게 어떻게 닿는지 가늠하지 못하는 어른이 늘어나는 사회에서, 그 어른들의 무신경한 행동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출구를 찾지 못하는 풍경을 짚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정당한 분노가 잘못된 출구로 흐르면, 그 출구의 끝에는 폭력이 있다. 이 글은 그 폭력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폭력의 자리가 만들어진 사회적 조건에 대해서는 짚어야 한다고 본다.

이 자리에서 부모에게 가장 친절한 말은 한 가지다. 자녀의 무신경함을 누군가 길에서 가르치게 될 자리까지 자녀를 보내지 말자. 그 자리에 갔을 때 자녀를 가르치는 사람은 친절한 어른이 아니다. 가해자다. 그리고 가해자에게 가르침을 받는 일은 자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중 가장 나쁜 일에 속한다. 부모가 집과 일상에서 자녀에게 작은 마찰을 보여주고 견디는 법을 알려주지 않으면, 결국 자녀가 그 가르침을 받는 자리는 길거리가 된다. 길거리는 사랑이 없는 자리다.


8. 부모의 자리 — 두 어른의 죄수의 딜레마

이쯤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고 싶다. 이 글은 부모를 비난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부모가 놓인 자리는 한 사람의 의지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 자리의 구조를 게임이론의 표현으로 옮기면, 부모는 두 어른의 죄수의 딜레마에 갇혀 있다. 한 부모가 혼자 자녀에게 마찰을 허용하면, 그 자녀는 마찰 없이 자란 다른 자녀들과의 경쟁에서 손해를 본다. 자녀가 학교에서 다른 자녀에게 맞고 와도 학교에 항의하지 않는 부모는 '자녀를 보호하지 않는 부모'로 보이고, 자녀의 사교육을 줄이는 부모는 '자녀의 미래를 포기하는 부모'로 보인다. 사회적 평판은 한 부모가 절제하는 순간 그 부모를 처벌한다.

그래서 부모는 알고 있다. 이 사랑의 강도가 자녀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그러나 한 사람의 부모가 강도를 낮추면, 그 자녀가 사회적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이 보인다. 모든 부모가 동시에 강도를 낮춰야만, 자녀들이 함께 마찰을 거치며 자라날 수 있다. 한 사람의 결정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자리다.

이 자리의 비극은 부모의 이성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이 부모를 가둔다는 데 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지 않아서 자녀를 과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자녀를 너무 사랑해서 과보호한다. 사랑이 깊을수록 과보호가 깊고, 과보호가 깊을수록 자녀의 회복 회로는 자라지 못한다. 사랑의 양이 늘어나는 그만큼 그 사랑의 부작용도 늘어난다.

그렇다면 길은 어디에 있는가. 한 사람의 부모가 빠져나올 수 없다면, 답은 사회적 합의에 있다. 자녀의 일상에 있는 작은 마찰이 자녀에게 좋다는 합의, 학교에서 자녀가 야단맞는 것이 자녀에게 좋다는 합의, 자녀의 작은 실패가 자녀에게 좋다는 합의가 부모들 사이에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이 합의는 한 시대 한 사회의 표준이 천천히 바뀌어야 가능한 일이다. 한 사람의 부모가 결정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다만 한 가지는 한 사람의 부모도 할 수 있다. 자기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자기 안에 두는 일이다. 그 사랑을 사회적 강요로 바꾸지 않는 일이다. 카페에서 자녀가 다른 손님에게 부딪히면, 자녀에게 사과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다. 강아지가 행인을 향해 짖으면, 행인의 표정을 먼저 살피는 일이다. 자녀의 작은 실패를 부모가 대신 항의해 주지 않는 일이다. 자녀가 야단맞을 때, 자녀의 편이 되어주는 동시에 자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함께 보는 일이다. 사랑이 자녀의 마찰을 차단하지 않는 일이다. 이 일은 부모 한 사람의 결심으로 가능하다.


9. AI 시대의 약한 어른 — 한 번의 충격에 대비하기

여기에 마지막 한 층을 더해야 한다. 시대의 변화다.

ChatGPT가 등장한 이후 가장 먼저 흔들린 직군이 일러스트레이터, 카피라이터, 번역가, 회계 보조, 법무 보조였다. 마이크로소프트의 2025년 분석은 화이트칼라 직무 약 500만 개가 향후 10년 안에 구조적 대체 위험에 직면한다고 추정했다. 이 추정이 정확하든 아니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머리를 쓰는 일자리의 상당 부분이 사라지거나 형태가 크게 바뀌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대에 가장 취약한 사람이 누구인가. 마찰 없이 자란 어른이다. 일자리가 한 번 흔들렸을 때 다시 일어설 회로가 자라지 못한 사람, 작은 실패를 누적해 본 적이 없어서 큰 실패를 분해할 줄 모르는 사람, 부모의 사랑 안에 머물던 시간이 길어서 자기 발로 처음 디뎌본 자리가 무너지고 있는 자리인 사람.

부모의 마음으로 보면 끔찍한 그림이다. 부모는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것을 했다. 학원, 사교육, 면접 준비, 직장 알선, 결혼 준비. 그런데 그 모든 보호 끝에 자녀가 일자리를 잃었을 때, 자녀에게 남는 것이 회복 회로가 아니라면 무엇이 남는가. 부모는 자녀를 보호한다고 믿었지만, 정확히 그 보호 때문에 자녀에게 가장 필요한 자산이 자라지 못했다. 그 자산의 이름이 '한 번 무너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능력'이다.

여기에 시간 제약이 결합한다. 부모는 영원히 살지 않는다. 부모가 떠난 자리에서 자녀가 혼자 살아가야 하는 시간이 반드시 온다. 그 시간이 50년이 될 수도 있고 60년이 될 수도 있다. 그 긴 시간 동안 자녀는 자기 신경계 하나로 세상의 마찰을 견뎌야 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은 자녀가 부모 없이 살아갈 수 있는 회로다. 사교육비도 아니고, 결혼 비용도 아니고, 유산도 아니다. 그 회로다.

이 회로는 어떻게 만드는가. 자녀의 일상에 작은 마찰을 다시 들여놓는 일에서 시작된다. 자녀가 친구와 다툰 일에 부모가 끼어들지 않기, 자녀가 작은 실패를 했을 때 위로하되 대신 풀어주지 않기, 자녀가 야단맞은 일에 학교에 항의하기 전에 자녀와 먼저 이야기하기, 자녀에게 집안일의 일부를 맡기고 그 결과를 책임지게 하기. 그리고 무엇보다, 자녀의 사랑스러움을 타인이 똑같이 느껴야 한다고 가정하지 않기. 자녀가 자기 사랑스러움을 자기 행동으로 보여주는 길을 부모가 막지 않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짚어야 한다. 부모 자신의 사회성 모양을 자녀에게 그대로 강요하지 않는 일이다. 친구가 많은 부모는 친구가 적은 자녀를 걱정하지만, 친구가 많지 않아도 잘 살아가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 자녀는 부모와 다른 사람이고, 자녀의 사회성은 자녀의 신경계가 자기 속도로 만든다. 부모가 자기 모양의 사회성을 자녀에게 부과하면, 그것 또한 사랑의 강요가 된다. 자녀가 자기 모양을 찾을 시간을 부모가 빼앗으면, 자녀는 자기 모양 없는 어른이 된다. 자기 모양 없는 어른이 가장 약한 어른이다.


10. 떠나보내는 일이 키움의 끝이다

키움의 목적은 지키는 것이 아니다. 떠나보내는 것이다. 인류가 수만 년 동안 해 온 일이 그것이다. 자녀가 어른이 되어 부모의 손을 떠나, 자기 발로 자기 자리를 만들고, 결국 자기 자녀를 키우는 자리에 서게 되는 그 과정 전체가 키움이다. 부모가 자녀를 자기 곁에 영원히 두는 그림은, 사랑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키움의 실패다.

이 글을 시작한 한 문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아이와 강아지는 너 눈에만 이쁘다." 이 문장은 부모의 사랑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부모의 사랑이 자기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이다. 자녀의 사랑스러움은 부모의 가장 사적인 자산이고, 그 자산이 사적인 자리에 있을 때 가장 크게 작동한다. 그 사랑이 사회적 강요로 변형되는 순간, 그것은 자녀에게도 손해가 되고 사회에도 손해가 된다.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깊은 사랑을 주는 길은, 자녀가 부모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어른이 되도록 키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부모는 자녀의 일상에 작은 마찰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자녀가 작은 거절을 받고, 작은 실패를 겪고, 작은 야단을 듣고, 작은 다툼을 풀고, 그때마다 자기 발로 일어서는 경험을 누적하도록 옆에 있어야 한다. 자녀의 자리에 부모가 들어가지 않고, 자녀가 자기 자리에 머물 수 있도록 옆 자리에 있어야 한다.

낙태를 경험한 사람도 있다. 강아지에게 물린 사람도 있다. 자녀를 잃은 사람도 있다. 이 사람들이 부모의 자녀를 같은 강도로 사랑해야 한다는 가정은 잘못된 가정이다. 사람은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그 상처는 부모의 사랑을 강요할 수 없는 자리다. 사회적 인식 때문에 그 상처를 가진 사람이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모의 사랑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범하고 있다는 신호다. 이 신호를 부모가 듣는 일이, 부드러운 사회의 시작이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다. 혼자 살 수 없다. 인류가 협동 번식자라는 사실은, 자녀가 마을의 자녀라는 사실이고, 마을이 사라진 시대에도 자녀는 결국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자녀를 사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는 일이, 키움의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 부모는 자녀의 사랑스러움이 사회 안에서도 발견되도록, 자녀의 행동이 사회의 결을 거스르지 않도록, 자녀가 자기 사랑스러움을 자기 행동으로 만들 수 있도록 자녀를 안내해야 한다.

이 안내의 마지막은 떠나보내는 일이다. 자녀의 손을 놓고, 자녀가 자기 발로 자기 자리에 서서, 자기 사랑을 자기 가족에게 줄 수 있게 되는 그 자리까지 자녀를 보내는 일이다. 그 자리에 자녀가 서면, 자녀는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을 자기 자녀에게 다시 줄 수 있게 된다. 사랑이 한 세대 안에 갇히지 않고, 다음 세대로 흐르는 일이 일어난다. 그것이 인류가 수만 년 동안 해 온 일이고, 우리가 지금 다시 해야 할 일이다.

자녀는 부모의 자산이 아니다. 자녀는 부모를 통해 세상에 온 또 한 사람이다. 그 사람이 자기 사람으로 자라나는 자리를 부모가 마련해 줄 때, 부모의 사랑은 가장 깊은 곳에 닿는다. 그 사랑은 강요하지 않는다.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자녀에게 가장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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