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간은 고통 없이 살 수 없는가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현대인과 삶의 방식에 대한 고찰

안승원 · Wonbrand 대표 · 2026년 5월 13일


1. 화면 위에 떠오르는 아픈 사람들

요즘 화면을 보고 있으면 이상한 장면을 자주 만난다.

SNS를 넘기고, 유튜브 댓글을 읽고, 짧은 영상들을 지나가다 보면 너무 많은 젊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이 힘들다고 말한다. 10대도 있고, 20대도 있고, 30대도 있다. 아직 자기 삶을 겨우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 자주 우울, 불안, 공황, ADHD, 무기력, 정신과, 상담, 병원 같은 말을 입에 올린다.

예전에는 이런 말들이 쉽게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정신병원에 다닌다고 하면 사람들은 먼저 병을 떠올리지 않았다. 미친 사람, 이상한 사람, 가까이하면 안 되는 사람. 그런 시선이 먼저 따라왔다. 마음이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이라기보다 사회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처럼 취급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정신과에 다닌다는 말이 일상 대화 안으로 들어왔다. 진단명을 자기소개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고, 상담을 받는 일을 숨기지 않는 사람도 있다. 예전 같으면 감추었을 말들이 이제는 화면 위에 그대로 올라온다.

처음에는 그 장면이 낯설었다. 왜 이렇게 많아졌을까. 정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픈 것일까. 아니면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고통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한 것일까.

그 장면을 보며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비난이 아니었다. 이상하다고 밀어내고 싶은 마음도 아니었다. 오히려 안타까움에 가까웠다.

한 사회가 이렇게 많은 젊은 사람에게 자기 고통을 말하게 만들고 있다면, 그 사회 안에서 무언가가 바뀐 것이다.

그 변화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2. 약해진 것처럼 보이는 시대

겉으로 보면 답은 쉬워 보인다.

요즘 사람이 약해진 것 아닌가.

과거는 훨씬 척박했다. 먹고사는 일부터 어려웠다. 하루하루 몸을 써야 했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고, 병원도 지금처럼 가깝지 않았고, 마음이 힘들다는 말을 꺼낼 여유도 없었다. 사람들은 강제로 그런 환경에 놓였다. 선택지가 없었고, 물러설 곳도 없었다. 그렇게 버티다 보니 몸도 정신도 단단해졌을 수 있다.

지금은 다르다. 먹을 것은 많아졌고, 정보는 넘치고, 병원도 있고, 정신적인 고통을 말할 언어도 생겼다. 과거에 비하면 분명히 많은 것이 나아졌다. 그런데도 힘들다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렇게 보인다.

풍족해졌는데 약해진 것 아닌가.

상처를 덜 받고 자라서 작은 고통에도 흔들리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 나도 그 질문을 피하고 싶지 않다. 사람은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 단단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한다. 아무 마찰 없이 자란 사람이 큰 마찰 앞에서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한 말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너무 쉽다.

과거의 고통이 사람을 강하게 만들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좋은 것이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먹고살기 힘들고, 몸이 닳고, 마음이 짓눌리고, 아무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시대를 두고 단지 “그때 사람들은 강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거칠다.

인간은 쉽게 죽지 않는다. 생각보다 오래 버틴다. 참으라고 하면 참고, 견디라고 하면 견디고, 무너진 다음에도 다시 일어난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그렇게 약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버틴다는 사실이 그 삶이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은 아주 나쁜 환경에서도 산다. 그 환경에 맞춰 굳어지고, 통증을 참는 법을 배우고, 자기 마음을 닫는 법을 배운다. 그렇다고 그것이 인간에게 가장 좋은 방식이라는 뜻은 아니다. 살아남는 것과 잘 사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질문은 다시 바뀐다.

현대인이 정말 약해진 것인가.

아니면 고통의 모습이 바뀐 것인가.


3. 풍족해졌는데 왜 더 흔들리는가

현대는 과거보다 편해진 부분이 많다. 굶주림은 줄었고, 의료는 발전했고, 물건은 넘치고, 혼자서도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도구는 많아졌다.

그런데 편해졌다는 말이 곧 덜 아프다는 뜻은 아니다.

과거의 고통은 더 직접적이었다. 배고픔, 노동, 질병, 추위, 폭력, 생존. 몸이 먼저 맞았다. 오늘 먹을 것, 내일 버틸 힘, 가족을 살릴 돈. 고통은 거칠었고 눈에 보였다.

현대의 고통은 조금 다르다. 비교, 미래, 관계, 인정, 실패, 돈, 외모, 속도, 정체성, 사회적 평가. 몸은 방 안에 있는데 정신은 계속 밖으로 끌려 나간다. 손은 가만히 있는데 머리는 쉬지 않는다. 누군가의 성공을 보고,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누군가의 삶을 보고, 자기 삶을 다시 재본다.

나는 일터에서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몸이 힘들면 정신이 편하다. 정신이 힘들면 몸이 편하다. 둘 다 편한 경우는 거의 드물다.

이 말은 몸의 고통이 정신의 고통보다 낫다는 뜻이 아니다. 몸과 정신의 고통은 서로 저울에 올릴 수 없다. 어느 쪽이 더 큰지, 어느 쪽이 더 진짜인지 쉽게 말할 수 없다.

다만 차이는 있다.

몸의 고통은 비교적 잘 보인다. 피가 나고, 붓고, 멍이 들고, 깁스를 하고, 절뚝거린다. 누군가 다리를 다치면 사람들은 그가 왜 천천히 걷는지 묻지 않는다. 이미 보이기 때문이다.

정신의 고통은 다르다. 보이지 않는다. 겉으로는 멀쩡히 앉아 있고, 말도 하고, 웃기도 한다. 그래서 더 쉽게 의심받는다. 정말 아픈가. 그냥 예민한 것 아닌가. 의지가 약한 것 아닌가. 다들 힘든데 왜 너만 그러는가.

마음의 상처는 몸의 상처보다 덜 아픈 것이 아니다. 단지 덜 보일 뿐이다.

이 보이지 않음이 현대인의 고통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4. 보이지 않는 상처는 이름을 찾는다

몸에 상처가 나면 붕대를 감는다. 피가 나면 닦고, 부러지면 고정하고, 멍이 들면 기다린다. 상처는 보이고, 보이는 상처는 설명이 필요 없다.

마음의 상처는 다르다. 피가 나지 않는다. 붕대를 감을 곳이 없다. 엑스레이에도 찍히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이 아픈 사람은 자기 고통을 계속 설명해야 한다.

그 설명이 반복되다 보면 사람은 이름을 찾는다.

우울증. 공황. 불안. ADHD. 번아웃. 무기력. 진단명. 상담. 병원. 이런 말들은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 고통을 처음으로 설명해주는 언어가 된다.

예전에는 말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은 말해진다. 그것은 좋은 변화일 수도 있다. 숨겨져 있던 고통이 언어를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불편한 장면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아픔을 너무 빨리 이름 안에 넣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 이름을 통해 연민을 얻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느낌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비난으로만 읽어도 안 된다.

보이지 않는 상처는 보이는 표식을 원한다. 누군가 내 상처를 알아봐 주기를 바란다. 내가 엄살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아프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진단명은 그런 점에서 붕대와 비슷하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 위에 감는 사회적 붕대다. 그것이 붙어 있으면 사람들은 조금 더 쉽게 이해한다. 적어도 그 고통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붕대는 상처를 설명할 뿐이다. 붕대가 곧 사람은 아니다.

진단명도 그렇다. 처음에는 나를 이해하기 위한 이름이었는데, 어느 순간 나를 가두는 이름이 될 수 있다. “나는 우울증이 있다”와 “나는 우울증인 사람이다”는 다르다. 앞의 문장은 상태를 말하고, 뒤의 문장은 존재를 말한다. 이 차이가 작지 않다.

진단명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전체를 그 이름 안에 넣어버리는 순간, 이름은 붕대가 아니라 방이 된다. 그리고 어떤 방은 오래 있으면 편해지지만, 오래 있을수록 밖으로 나오기 어려워진다.


5. 고통은 없는 게 좋은데 왜 사라지지 않는가

나는 고통을 좋아하지 않는다.

고통은 없는 게 좋다. 아프지 않을 수 있다면 아프지 않은 편이 좋다. 마음도 몸도 덜 다치는 편이 좋다. 굳이 상처를 찾아다닐 이유는 없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서는 고통 없이 살기가 어렵다.

사회와 단절하면 고통은 줄어들 수 있다. 비교할 사람도 줄고, 부딪힐 사람도 줄고, 기대할 사람도 줄고, 실망할 일도 줄어든다.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거절당할 일도 없다. 혼자 있으면 적어도 사람 때문에 다치는 일은 줄어든다.

하지만 전 세계에 나 혼자 남는다면, 그것은 고통 없는 삶이 아니라 의미 없는 삶에 가까울 것이다. 아무에게도 상처받지 않겠지만, 아무에게도 닿지 못한다. 아무도 나를 평가하지 않겠지만,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는다. 누구도 나를 버리지 않겠지만, 누구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은 같이 사는 의미로 사람인 것 같다.

이 문장 안에 이상한 모순이 있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과 함께 사는 순간 고통이 생긴다. 비교가 생기고, 기대가 생기고, 거절이 생기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며칠씩 남고, 누군가의 표정 하나가 하루를 망친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마음 안에서는 오래 남는다.

그렇다면 고통의 핵심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상호작용이라고 생각한다.


6. 상호작용이라는 자리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사건이 생긴다. 말이 오가고, 표정이 오가고, 기대가 오가고, 실망이 오간다. 그 사이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사랑받는가. 나는 쓸모 있는가. 나는 뒤처졌는가. 나는 이상한가. 나는 충분한가. 이런 질문들은 혼자 산속에 앉아 있을 때보다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더 강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상호작용은 고통을 만든다.

하지만 여기서 끝내면 반쪽이다.

상호작용은 치유도 만든다.

사람은 사람 때문에 다치지만, 사람 때문에 회복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상처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다시 일어서게 하기도 한다. 어떤 관계는 사람을 무너뜨리고, 어떤 관계는 사람이 아직 살아도 된다고 느끼게 한다.

그러니까 인간관계는 단순히 독이 아니다. 약도 아니다. 독이면서 약이고, 상처이면서 붕대이고, 고통이면서 회복이다.

이 점을 놓치면 현대인의 정신적 고통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사람과의 관계가 아프다고 해서 관계를 모두 끊으면 고통은 줄 수 있다. 그러나 치유의 길도 함께 줄어든다. 반대로 관계가 필요하다고 해서 모든 관계 안으로 무작정 들어가면, 사람은 다시 다친다.

문제는 사람이냐 고립이냐가 아니다.

어떤 상호작용 안에 있는가다.

그리고 그 상호작용 속에서 내가 얼마나 다치고, 어디에서 회복되는지를 아는 일이다.


7. 보호는 접촉을 끊는가, 접촉을 감당하게 하는가

이 질문은 아이를 키우는 문제와도 이어진다.

사람이 고통을 완전히 피해야 한다면, 아이는 아무것도 겪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상처받기 전에 막아주고, 실패하기 전에 대신 처리하고, 갈등이 생기기 전에 빼내고, 나쁜 말을 듣기 전에 귀를 막아주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란 사람은 정말 안전해지는가.

부모의 과잉보호는 아이와 세계의 접촉을 끊을 수 있다. 아이가 넘어지기 전에 잡아주고, 혼나기 전에 대신 항의하고, 친구와 부딪히기 전에 어른이 개입하고, 실패하기 전에 길을 치워준다. 그 마음이 사랑에서 나왔더라도 결과는 다를 수 있다. 작은 마찰을 겪고 돌아오는 경험이 사라진다.

하지만 마을의 보호는 다르다.

예전의 마을은 아이를 상처 없는 유리 상자 안에 넣어두지 않았다. 아이는 또래와 부딪히고, 어른에게 혼나고, 낯선 사람의 표정을 읽고, 작은 창피를 겪고, 작은 도움을 받았다. 마을은 아이를 세계에서 숨기는 장치가 아니었다. 세계와 만나게 하되 완전히 버려지지 않게 하는 장치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보호의 문제는 보호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부모의 과잉보호는 접촉을 끊을 수 있다. 마을의 보호는 접촉을 감당 가능한 크기로 만들 수 있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고통을 없애는 것이 항상 답은 아닐 수 있다. 작은 고통까지 모두 제거하면, 사람은 큰 고통이 왔을 때 자기 몸과 마음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모를 수 있다. 그렇다고 큰 고통이 좋은 것은 아니다. 옛날처럼 거칠고 극심한 고통이 사람을 키운다는 말도 너무 위험하다.

그래서 질문은 더 어려워진다.

인간에게 필요한 고통은 어느 정도인가.


8. 어느 정도의 고통인가

“적당한 고통이 필요하다”는 말은 쉽다. 그러나 그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고통의 문제는 양만의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아팠는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같은 사건도 어떤 사람에게는 지나가는 경험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 남는 상처가 된다. 같은 실패도 누군가에게는 다음 시도의 재료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다시는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기억이 된다.

중요한 것은 고통의 조건이다.

그 고통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인가. 그 고통 뒤에 돌아갈 곳이 있는가. 그 고통이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 그 고통이 몸을 쓰게 하는가, 정신을 계속 갉아먹는가. 그 고통이 나를 세계와 접촉하게 하는가, 아니면 나를 완전히 닫아버리는가.

어느 정도의 고통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은 사실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어떤 고통은 사람을 망가뜨리지 않고 지나갈 수 있는가.

어떤 고통은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알게 하는가.

어떤 고통은 사람을 다시 세계로 돌려보내고, 어떤 고통은 사람을 자기 안에 가두는가.

나는 아직 이 질문에 완전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한 가지는 점점 분명해진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다. 고통을 미화할 필요는 없다. 고통은 없는 게 좋다. 그러나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면, 필요한 것은 고통을 겪고도 자신을 잃지 않는 방식이다.

고통이 왔을 때 내가 무엇에 무너지는지 아는 것.

어떤 관계에서 내가 더 아픈지 아는 것.

어떤 일에서 내가 다시 살아나는지 아는 것.

어떤 꿈이 나를 다시 걷게 하는지 아는 것.

이 질문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9. 나는 나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나도 내가 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나를 많이 들여다보려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장점이 있고 어떤 단점이 있는지, 어떤 일에 무너지고 어떤 일에 다시 살아나는지 계속 물었다. 사주를 본 것도, AI에게 나를 물어본 것도, 내 사고방식과 성향을 계속 확인하려 한 것도 결국 같은 이유였다.

나는 나를 알고 싶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모르면, 나는 내가 어떤 고통에 무너지는지도 모른다. 내가 무엇에서 회복되는지도 모른다.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왜 사는지 생각했다. 그냥 죽을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1000번도 넘게 했다.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이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이렇게 고통 속에서 움직여야 하는지,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안에 하나의 큰 말이 남았다.

홍익인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그 말이 나에게는 방향이 되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을 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을 때, 그 말은 하나의 북극성처럼 남았다.

그래서 나는 창업했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지금도 쉽지 않다. 돈도 어렵고, 몸도 어렵고, 마음도 어렵다. 그래도 나는 그 방향으로 살아오고 있다. 인간을 이롭게 하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다.

이것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나에게는 이것이 현재까지의 답이다.

나는 나를 연구하고, 내가 견딜 수 있는 고통과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알아가고, 내가 회복되는 관계와 무너지는 관계를 구분하려 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홍익인간이라는 방향을 붙잡고 살아가려 한다.


10. 다시, 왜 인간은 고통 없이 살 수 없는가

처음 질문은 화면 위에서 시작되었다.

왜 이렇게 많은 젊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힘들다고 말하는가.

그 질문은 곧 다른 질문으로 바뀌었다.

현대인이 약해진 것인가. 과거의 고통이 사람을 강하게 만들었는가. 현대는 정말 편해진 것인가. 몸의 고통과 정신의 고통은 어떻게 다른가. 마음의 상처는 왜 보이지 않는가. 왜 사람은 자기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가. 왜 사회와 연결되는 순간 고통이 생기는가. 그런데 왜 사람은 사회 없이는 살 수 없는가. 어떤 보호는 사람을 약하게 만들고, 어떤 보호는 사람을 다시 세우는가. 어느 정도의 고통이 필요한가.

이 모든 질문은 하나로 모인다.

왜 인간은 고통 없이 살 수 없는가.

아마 인간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혼자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다. 타인과 부딪히고, 비교하고, 실망하고, 상처받고, 다시 위로받고, 인정받고, 회복하면서 자기 삶을 만든다.

그 과정에서 고통은 생긴다.

그러나 고통이 있다는 사실이 삶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무조건 찬양하는 것도 아니고, 고통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고통 속에서 나를 잃는지, 어떤 고통을 지나며 나를 이해하게 되는지,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 무너지고 어떤 관계에서 회복되는지, 어떤 꿈을 붙잡을 때 다시 걸을 수 있는지 아는 일이다.

인간은 고통 없이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고통만으로 사는 존재도 아니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 자기 방향을 찾고, 그 방향을 붙잡고, 다시 걷는 존재다.

내게 그 방향은 홍익인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 길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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