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이 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들

시각의 골전도는 어디에 있는가

안승원 · Wonbrand · 2026년 8월 4일


골전도 이어폰이 알려주는 것

골전도 이어폰은 귀를 막지 않는다. 광대뼈 위에 얹어 놓기만 하는데 소리가 들린다.

처음 써 보면 좀 이상하다. 귀는 열려 있는데 음악이 머릿속에서 울린다. 그런데 정작 신기한 건 다른 데 있다.

배울 게 없다는 것이다.

사용법을 익힐 필요가 없다. 진동을 소리로 해석하는 훈련도 필요 없다. 그냥 켜면 소리로 들린다. 왜 그럴까.

소리가 귀로 들어오는 길은 이렇게 생겼다. 바깥귀가 소리를 모으고, 고막이 떨리고, 그 떨림을 작은 뼈 세 개가 증폭해서 달팽이관에 넘긴다. 달팽이관이 그걸 전기 신호로 바꾸면 청신경이 뇌로 나른다.

골전도는 이 중에서 앞의 세 단계를 건너뛴다. 두개골을 직접 흔들어서 달팽이관을 울린다. 그런데 달팽이관부터 뒤로는 아무것도 안 건드린다.

정상  바깥귀 → 고막 → 뼈 세 개 → 달팽이관 → 청신경 → 뇌
골전도 ──── 건너뜀 ────→ 두개골 → 달팽이관 → 청신경 → 뇌
                                    ↑
                        여기부터는 원래대로 일한다

그래서 배울 게 없는 것이다. 뇌 입장에서는 평소랑 똑같은 신호가 평소랑 똑같은 길로 올라온다. 앞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뇌는 모른다.

이게 감각을 바꿔치기하는 것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소리를 진동으로 바꿔서 등에 전달하는 장치도 있는데, 그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이다. 몇 달이 걸린다. 골전도는 배우지 않는다.

그래서 질문은 이렇게 된다. 시각에도 그런 자리가 있는가. 앞쪽만 건너뛰고 나머지는 원래대로 일하게 만들 수 있는 자리가.

필름만 상한 카메라

여기서 좀 놀라운 사실 하나를 짚고 가야 한다.

실명의 대부분은 맨 앞에서 일어난다.

눈으로 들어온 빛은 망막에 있는 광수용체가 받는다. 이게 필름 역할이다. 필름이 신호로 바꾼 걸 몇 단계 거쳐 신경절세포가 정리하고, 시신경이 뇌로 나르고, 중간 역인 외측슬상핵을 거쳐 뒤통수의 시각피질에 도착한다. 그리고 얼굴은 방추상얼굴영역이라는 전담 회로가 알아본다.

망막색소변성도, 황반변성도, 광수용체가 죽는 병이다. 즉 필름이 상한 것이다.

그런데 그 뒤는? 신경절세포도, 시신경도, 외측슬상핵도, 시각피질도, 얼굴 전담 회로도 대부분 살아 있다.

대부분의 실명자는 필름만 상한 카메라다. 렌즈도 멀쩡하고, 배선도 멀쩡하고, 현상소도 멀쩡하다.

그러면 답은 단순해진다. 필름 다음 자리로 들어가면 된다.

그리고 여기에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있다. 일단 들어가고 나면, 얼굴은 얼굴 전담 회로가 알아본다.

우리가 "이 사람은 어머니입니다"라고 알려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건 원래 그 회로가 평생 해온 일이다. 우리는 재료만 넣어주면 된다.

이 구별이 중요하다. 얼굴을 소리 신호로 압축해서 "리듬 세 번에 금속성 음색이면 어머니"처럼 알려주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얼굴이 아니라 이름표다. 뇌 안에 이미 있는 전문가를 놀려두고 그 일을 대신하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어디로 들어갈 것인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여러 군데다. 자리마다 필요한 방법이 다르고, 도움이 되는 사람도 다르다.

망막 안쪽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눈은 이미 뚫려 있는 창이니까, 눈 표면에서 전기로 살아 있는 신경절세포를 건드리는 것이다. 광수용체 질환에 해당하니 가장 많은 사람에게 맞는다.

망막을 통째로 건너뛰는 방법도 있다. 코 뒤에는 접형동이라는 빈 공간이 있는데, 여기가 시신경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몇 밀리미터밖에 안 떨어져 있다. 그리고 이 공간은 코를 통해 들어갈 수 있다. 두개골을 열지 않고 뇌 안에 자리를 잡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더 안쪽으로 가면 외측슬상핵과 시각피질이 있다. 눈도 시신경도 전부 건너뛰는 자리다. 여기까지 가려면 머리 밖에서 뇌 깊은 곳을 정확히 찍어야 하는데, 그게 지금까지 안 되던 일이었다. 뒤에서 이야기하겠다.

그리고 곁길이 하나 더 있다. 시신경 섬유의 10% 정도는 시각피질로 안 가고 상구라는 다른 곳으로 간다. 시각피질이 망가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앞의 장애물을 피하는 현상이 있는데, 그게 이 곁길 때문이다. 아무도 이 길을 일부러 노려본 적이 없다.

정리하면 이렇다.

들어가는 자리여기로 들어가면주로 누구에게
망막 안쪽 (신경절세포)망가진 필름만 건너뛴다망막색소변성, 황반변성 — 실명의 다수
시신경 교차부 (코 뒤 공간)망막을 통째로 건너뛴다망막 전체 손상, 안구 적출
외측슬상핵 · 시각피질눈과 시신경까지 전부 건너뛴다녹내장 말기, 시신경 손상
상구 (곁길)시각피질조차 우회한다피질맹

표를 보면 알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시각의 골전도"는 하나가 아니다. 어디가 망가졌느냐에 따라 들어갈 문이 달라진다.


손전등 두 개를 겹치면

이제 이 글에서 가장 새로운 이야기를 하겠다.

머리 밖에서 전기를 흘려 뇌를 자극하는 건 오래된 기술이다. 그런데 이게 늘 뭉뚝했다. 두피에 전극을 붙이면 전류가 두개골 전체로 퍼져버린다. 뇌 안의 특정 지점만 콕 찍을 수가 없다.

뭉뚝하면 그림을 못 그린다. 그림을 못 그리면 얼굴은 영영 안 된다. 여기가 막힌 지점이었다.

그런데 비틀 방법이 있다.

신경세포에는 성질이 하나 있다. 너무 빠른 신호는 무시한다. 초당 수백 번을 넘어가면 따라가질 못해서 그냥 없는 셈 친다.

이 성질을 이용하면 이렇게 할 수 있다.

한쪽 전극에서 초당 2,000번 진동하는 전류를 흘린다. 너무 빨라서 신경은 무시한다. 다른 쪽 전극에서는 초당 2,010번짜리를 흘린다. 이것도 무시한다.

그런데 두 전류가 겹치는 지점에서는 두 파동이 서로 간섭하면서 초당 10번짜리 느린 맥놀이가 생긴다. 이건 신경이 반응하는 속도다.

그러니까 전류가 지나가는 길에서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겹치는 자리에서만 효과가 난다.

손전등 두 개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비추면 겹친 자리만 밝아지는 것과 같다. 다만 여기서는 밝기가 아니라 주파수의 차이가 겹친다.

이 방식은 2017년에 쥐 실험으로 발표됐다. 두개골을 열지 않고 뇌 깊은 곳만 자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아직 아무도 이걸 시각에 써보지 않았다.

왜 안 했을까. 이 기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파킨슨병이나 우울증 같은 걸 노리고 있고, 시각 쪽 사람들은 "전극을 몇 개나 심을까"만 생각하고 있다. 두 무리가 만난 적이 없다. 정작 시각피질은 뒤통수 바로 안쪽이라 접근이 오히려 쉬운 자리인데도 그렇다.


브라운관 텔레비전의 비밀

겹치는 자리에서만 효과가 난다는 것도 좋은데, 진짜는 그 다음이다.

겹치는 자리를 옮길 수 있다. 전극을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각 전극에 흘리는 전류의 비율만 바꾸면 교차점이 이동한다. 스위치 조작만으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움직일 수 있으면 훑을 수 있다. 훑을 수 있으면 그림이 그려진다.

여기서 옛날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떠올려 보면 좋겠다. 그 무거운 TV 안에는 화소가 하나도 없었다. 전자빔 하나가 화면을 위에서 아래로 아주 빠르게 훑고 지나갔을 뿐이다. 사람 눈이 그 잔상을 하나의 화면으로 합쳐서 봤다.

같은 짓을 머릿속에서 하는 것이다. 자극점 하나를 초당 수십 번 훑어서 얼굴을 그린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지금까지 시각 보철의 화질은 전극을 몇 개나 심었느냐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60개 심으면 60화소다. 그래서 다들 전극을 늘리려고 애썼고, 그러려면 수술이 커졌다.

훑는 방식은 그 굴레를 벗어난다. 전극 몇 개로 화소 수백 개를 만든다.

이 아이디어에 이름을 붙이자면 간섭 붓쯤 되겠다.

이걸 죽일 수 있는 질문이 하나 있다. 교차점을 얼마나 작게 만들 수 있는가. 시각피질에서 시야 1도에 해당하는 넓이가 밀리미터 단위인데, 교차점이 센티미터짜리로 뭉개지면 그림이 아니라 얼룩이 된다. 이 하나로 아이디어 전체가 살거나 죽는다.

다행인 건 머리 모형에 전기장 계산을 돌려보면 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무언가를 대보기 전에 계산만으로 판가름할 수 있다.

이미 켜져 있는 화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 보겠다. 아마 이 글에서 가장 이상하게 들릴 텐데, 근거는 가장 확실한 이야기다.

샤를 보네 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시력을 잃은 사람이 선명한 환영을 보는 현상이다. 사람 얼굴, 무늬, 건물, 풍경이 또렷하게 보인다. 정신질환이 아니고, 본인도 그게 진짜가 아닌 걸 안다. 시각을 잃은 사람 중 상당수가 겪는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시각피질에 들어오는 게 끊기면 그 회로가 스스로 영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입력이 없으니 잡음을 증폭해서 그림으로 빚어낸다.

이 사실을 뒤집어 읽으면 이렇게 된다.

실명자의 뇌에서 영상 생성기는 지금도 돌아가고 있다. 화면도 켜져 있다. 조종만 못 할 뿐이다.

지금까지 의학은 이걸 없애야 할 증상으로만 다뤘다. 환자를 안심시키고, 심하면 약으로 눌렀다. 아무도 이걸 쓸 수 있는 자원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조종할까.

꿈을 꾸다가 알람이 울리면 그 소리가 꿈 안으로 들어온다. 전화벨이 꿈속 전화가 되고, 물소리가 꿈속 비가 된다. 영상 생성기가 최대로 돌아가고 있을 때는 아주 약한 외부 신호도 내용에 편입된다.

환영도 마찬가지 아닐까. 환영이 시작되는 순간을 뇌파로 잡아내고, 바로 그 순간에 약한 단서를 흘려 넣는다.

이 방식의 매력은 필요한 힘이 훨씬 적다는 데 있다. 없는 그림을 처음부터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그림의 방향만 트는 일이기 때문이다.

같은 발상에서 나오는 아이디어가 몇 개 더 있다.

꿈으로 얼굴을 심는 방법. 자는 동안 특정 소리를 들려주면 그와 연결된 기억이 강화된다는 건 이미 확인된 현상이다. 잠든 사이에 어떤 사람의 목소리를 들려주면 꿈이 그 사람의 얼굴을 만들어낸다. 목소리와 얼굴을 밤마다 붙여 놓으면, 나중에는 목소리만 들어도 얼굴이 떠오른다. 장치가 매번 얼굴을 그려 보낼 필요가 없어진다.

틀렸다고만 알려주는 방법. 뇌는 늘 앞을 예측하고 있고, 시각은 그 예측을 수정하는 역할을 한다. 실명하면 수정이 안 되니 예측이 제멋대로 흘러간다. 그렇다면 그림을 통째로 보낼 게 아니라 "네 예측이 이쪽으로 틀렸다"만 보내면 된다. 전달할 정보가 훨씬 적어진다.

이건 물어보기만 하면 확인된다. 샤를 보네 증후군을 겪는 분들께, 환영이 보이는 중에 소리나 촉각 자극을 드리고 환영의 내용이 바뀌는지 물어보면 된다. 장비도 수술도 필요 없다. 그런데 아무도 이 질문을 해본 적이 없다.

거꾸로 뒤집으면 신호는 저쪽에서 온다

이 프로젝트는 원래 투명인간 장치를 뒤집는 데서 시작했다.

그 장치는 이런 구조였다. 수트를 입은 사람이 스스로 신호를 내보내서, 주변 사람들의 의식에서 자기 존재를 지운다. 몸은 그대로 거기 있는데 아무도 "저기 사람이 있다"고 알아차리지 못한다.

여기서 신호를 내는 쪽은 보이는 사람이었다.

이걸 뒤집는다고 하면 대개 "시각장애인 쪽에 장치를 단다"를 떠올린다. 그런데 그건 절반만 뒤집은 것이다. 제대로 뒤집으려면 신호를 내는 쪽이 여전히 보이는 사람이어야 한다.

투명인간   보이는 사람이 신호를 낸다 → 남의 의식에서 자기를 지운다
역구조     보이는 사람이 신호를 낸다 → 볼 수 없는 사람의 의식에 자기를 넣는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사람이 자기 얼굴 정보를 스스로 내보낸다. 배지든, 휴대폰이든, 옷깃에 붙인 작은 표식이든. 카메라로 남의 얼굴을 몰래 찍는 게 아니라 본인이 켜서 보내는 것이다.

이 하나가 한꺼번에 푸는 문제가 많다.

사생활 문제가 사라진다. 동의가 구조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둠도 상관없다. 카메라가 필요 없으니까. 거리도 문제가 안 된다. 전파는 멀리 간다. 가방이나 팔에 가려도 통과한다. 그리고 얼굴 사진을 보낼 필요가 없으니 화소 부족 문제 자체가 없어진다.

왜 아직 아무도 안 했을까.

보조기기라는 분야가 "장애인이 모든 부담을 진다"는 전제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비장애인 쪽에 뭘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점자블록은 정확히 그걸 했다. 시각장애인이 특별한 신발을 신은 게 아니라, 사회가 바닥을 바꿨다. 엘리베이터 버튼의 점자도, 횡단보도의 음향신호기도 마찬가지다. 전부 환경 쪽이 신호를 내는 방식이다.

같은 계열로 몇 가지가 더 나온다. 전자장치 없이 안경테나 옷깃에 붙이는 작은 반사 표식 — 배터리도 동의 절차도 필요 없고, 야간 도로 표지처럼 어두울수록 더 잘 잡힌다. 계단이나 문이나 기둥이 각자 자기가 무엇인지 알리는 작은 태그 — 몸에 무거운 센서를 다 실을 필요가 없어진다. 심지어 화장품에 섞는 방법도 있다. 비장애인 눈에는 안 보이고 장치에는 또렷한 표식. "표식을 달아라"는 요구는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지만, 안 보이면 받아들여진다.


주파수는 붓이 아니라 붓을 놓는 손이다

주파수로 얼굴을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겠다.

주파수 자체가 얼굴을 실어 나르지는 못한다. 얼굴은 공간 정보다. 어디가 밝고 어디가 어두운지가 배치되어야 얼굴이 된다. 그런데 주파수는 1차원이라 배치를 담을 수 없다.

그런데 주파수가 하는 일이 세 가지 있고, 그중 하나가 결정적이다.

첫째, 주파수를 바꾸면 보이는 빛점의 성질이 바뀐다. 밝기나 크기가 달라진다. 전극 하나가 여러 화소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유용하지만 보조적이다.

둘째, 라디오 채널처럼 여러 신호를 주파수로 나눠서 동시에 보낼 수 있다. 이것도 보조적이다.

셋째가 진짜다. 두 개의 높은 주파수를 교차시키면 그 차이만큼의 느린 신호가 교차점에서만 생긴다. 앞에서 이야기한 그 원리다.

그러니까 정확한 답은 이렇다. 주파수로 얼굴을 보는 게 아니라, 주파수 덕분에 얼굴을 그릴 자리를 찍을 수 있게 된다. 직관은 맞았는데, 주파수가 붓이 아니라 붓을 그 자리에 갖다 놓는 손이었다.

얼굴은 생각보다 적은 정보로 알아본다

여기서 반가운 사실이 하나 나온다.

1973년에 유명한 실험이 있었다. 링컨 초상화를 커다란 사각형 덩어리로 뭉개서 보여줬는데, 가로세로 열여섯 칸 정도만 있어도 사람들이 링컨을 알아봤다.

얼굴 인식은 세밀한 무늬가 아니라 큼직한 명암 배치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눈썹 밑이 어둡고, 코 옆이 밝고, 턱선이 이렇게 진다 — 이런 덩어리 정보만으로 우리는 사람을 알아본다.

이건 좋은 소식이다. 화소 수백 개면 얼굴이 된다. 수만 개가 필요한 게 아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훑는 방식으로 충분히 닿는 숫자다.

여기에 몇 가지를 더 붙이면 훨씬 유리해진다.

사진 말고 캐리커처를 보내는 것. AI가 그 사람이 평균적인 얼굴과 다른 점을 과장한 그림을 만들어 보낸다. 캐리커처가 실제 사진보다 더 빨리 식별된다는 연구가 있다. 화소가 부족할수록 이 방식이 유리하다.

얼굴은 늘 같은 자리에 그리는 것. 상대가 어디에 서 있든 얼굴은 항상 정면, 정중앙, 같은 크기로 그린다. 어디 있는지는 다른 방법으로 따로 알려준다. 각도와 거리 변화를 빼버리면 그 좁은 통로가 오직 "누구인가"에만 쓰인다.

일부러 조금씩 흔들어 주는 것. 사람 눈은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쉬지 않고 미세하게 떨린다. 이 떨림이 없으면 보이던 것이 사라진다. 가만히 있는 자극은 몇 초 만에 지각에서 지워진다. 그래서 자극 패턴도 조금씩 흔들어야 하는데, 이걸 처음부터 설계에 넣은 시각 보철이 아직 없다.


얼굴을 푸는 세 갈래 길

얼굴이 가장 중요한 요구조건이니 따로 정리하겠다. 원리가 완전히 다른 세 갈래가 있다.

하나 — 그려서 보여준다

시각 경로에 진입해서 실제로 얼굴 그림을 넣는다. 간섭 붓이 이 길이다. 성공하면 진짜로 보는 것에 가장 가깝다. 대신 아직 아무도 안 해봤다.

둘 — 상대가 보내준다

얼굴 발신기 쪽이다. 이 길의 장점은 지금 당장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뇌를 전혀 건드리지 않으니 연구가 필요 없다. 남은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사회적 수용뿐이다.

셋 — 만져서 안다

실명자들이 실제로 얼굴을 아는 방법은 손으로 만지는 것이다. 이걸 원격으로 확장하면 된다.

3차원 카메라로 상대 얼굴의 굴곡을 읽어서, 손에 닿는 면에 실제 요철로 재현한다. 코가 튀어나오고 눈이 들어간다. 신호가 아니라 모양이다.

이 방식은 배울 게 없다. 이미 평생 하던 일을 멀리서 하는 것뿐이다.

"소리 코드로 누구인지 알려주기"와 이 방식의 차이가 여기서 갈린다. 그건 이름표고, 이건 얼굴이다.


아직 두드려보지 않은 문들

깊이 파지는 못했지만 버리기 아까운 것들이 있다.

코 뒤의 빈 공간. 접형동은 시신경 교차부에서 몇 밀리미터 거리다. 코를 통해 들어갈 수 있으니 두개골을 열지 않고 뇌 안에 자리를 잡는 길이 된다. 왜 아무도 안 했을까. 뇌를 다루는 사람들은 "이식은 곧 개두술"이라고 생각하고, 코를 다루는 사람들은 시각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기뱀장어처럼 보는 법. 전기어는 몸 주변에 약한 전기장을 만들고 그 일그러짐으로 주변을 파악한다. 사람도 같은 걸 할 수 있다면 카메라가 아예 필요 없어진다. 어둠도 사생활 문제도 통째로 사라진다. 물속 생물의 감각이라 공기 중에서 시도해본 사람이 없을 뿐이다.

각막 위에 그리기. 각막은 사람 몸에서 감각신경이 가장 촘촘한 표면이다. 손끝보다 훨씬 촘촘하고, 게다가 이미 2차원 평면이다. 콘택트렌즈형 전극으로 각막 위에 얼굴을 그릴 수 있다. 시각 경로는 아니지만 해상도만큼은 몸에서 최고다. 각막은 "건드리면 안 되는 곳"으로 취급되지만, 콘택트렌즈는 이미 수억 명이 매일 낀다.

맹시의 곁길 노리기. 시각피질이 손상돼도 상구를 거치는 길이 남아서, 의식하지 못한 채 위치와 움직임에 반응한다. 이 현상은 지금까지 연구 대상이었지 통로로 여겨진 적이 없다.

뇌파에 박자 맞추기. 뇌가 자극을 잘 받아들이는 순간이 주기적으로 온다. 그 순간에 맞춰 쏘면 약한 자극으로도 통한다. 공짜로 얻는 이득인데 아무도 챙기지 않는다.

목소리와 얼굴 묶기. 뇌 안에서 목소리와 얼굴은 서로 붙어 있다. 반복해서 함께 겪게 하면 나중엔 목소리만 들어도 얼굴이 떠오른다. 그러면 장치는 확인만 해주면 된다. 다만 장치를 파는 회사는 장치가 덜 필요해지는 설계를 잘 하지 않는다.


먼저 물어봐야 할 질문들

여기까지가 생각들이다. 이제 어느 것이 진짜인지 가릴 차례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 가장 새로운 아이디어일수록 확인하기가 쉽다. 아직 아무도 안 해봤다는 건 뒤집어 말하면, 처음 던져야 할 질문이 아직 단순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환영을 조종할 수 있는가. 샤를 보네 증후군을 겪는 분들께, 환영이 보이는 중에 소리나 촉각 자극을 드리고 내용이 바뀌는지 여쭤본다. 면담과 기록이면 된다.

교차점을 얼마나 작게 만들 수 있는가. 머리 모형에 전기장 계산을 돌린다. 사람에게 아무것도 대보기 전에, 계산만으로 간섭 붓이 살지 죽을지가 판가름 난다.

얼굴 발신기를 사람들이 받아들일까. 기술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냥 물어보면 된다. "당신이 직접 켜서 보내는 방식이라면 하시겠습니까."

목소리로 얼굴이 떠오르는가. 후천 실명자에게 아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얼굴이 얼마나 또렷하게 떠오르는지 여쭤본다.

물론 장비가 필요한 것들도 있다. 저해상도 얼굴로 실제 지인 식별률을 재는 일, 각막 위에 그린 모양이 구분되는지 확인하는 일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앞의 넷이 먼저다.

가장 새로운 네 가지 아이디어의 생사가, 사람에게 질문 하나 던지는 것으로 갈린다. 그런데 아무도 그 질문을 해본 적이 없다.

이 글에서도 못 간 곳

다음 발산의 씨앗으로 몇 개 적어둔다.

  • 얼굴 전담 회로를 직접 노리기. 얼굴만 처리하는 회로가 뇌에 따로 있는데 아무도 거길 겨냥하지 않는다. 시각피질을 거치지 않고 여기만 자극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
  • 선천맹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의 시각피질은 이미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이 글은 사실상 후천맹만 다뤘다.
  • 여러 사람이 같이 쓰면. 모든 설계가 "한 사람이 장치를 쓴다"를 전제한다. 여러 사람이 같은 공간 정보를 공유하면 무엇이 달라질까.
  • 천천히 쌓아도 되는 정보. 모든 설계가 실시간을 가정한다. 어떤 정보는 몇 분에 걸쳐 천천히 전달해도 된다.
  • 벗어도 되는 장치. 훈련이 끝나면 필요 없어지는 장치. 목소리와 얼굴을 묶는 방법이 그 방향이다.

마지막

골전도가 대단한 건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서가 아니다. 이미 있는 시스템의 앞단만 건너뛰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울 게 없고, 그래서 그냥 소리로 들린다.

시각에서 그 자리를 찾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 알게 된 것이 있다. 그 자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다. 어디가 망가졌느냐에 따라 들어갈 문이 다르다. 그리고 그중 몇 개는 아직 아무도 두드려보지 않았다.

더 중요한 건 이것이다. 그 문들 중 넷은 질문 하나로 열리거나 닫힌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뜻이다.


참고 자료

저자의 이전 글
안승원, 투명인간 프로젝트: 내가 발견되고 싶지 않은 공간 (2026-05-28) — 이 글이 뒤집은 원본.
안승원, 생각만으로 소프트웨어를 조작할 수 있다면 — 답이 뇌가 아니라 목에 있는 이유 (2026-04-18).

교차 자극
Grossman 외 (2017), Cell. 두 개의 고주파 전기장을 교차시켜 두개골을 열지 않고 뇌 깊은 곳만 자극하는 데 성공. 쥐 실험. 이 원리를 시각에 적용한 연구는 아직 없다.

뇌가 스스로 만드는 시각
샤를 보네 증후군 — 시력을 잃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선명한 환시. 시각피질의 입력 차단에 따른 자발 활동으로 설명된다. 지금까지 억제 대상으로만 다뤄졌다.
표적 기억 재활성화 — 수면 중 특정 소리를 들려주면 연관된 기억이 강화된다.
맹시 — 시각피질이 손상돼도 상구를 거치는 곁길이 남아, 의식하지 못한 채 위치와 움직임에 반응한다.

얼굴이 얼마나 적은 정보로 인식되는가
Harmon & Julesz (1973), Science. 링컨 초상화를 굵은 사각형으로 뭉개도 알아본다. 얼굴 인식은 세밀한 무늬가 아니라 큼직한 명암 배치로 이뤄진다.
캐리커처 우위 효과 — 특징을 과장한 얼굴이 실제 사진보다 더 빨리 식별된다.
방추상얼굴영역 — 얼굴 전담 회로. 진입 이후 경로가 살아 있으면 얼굴 판정은 이 회로가 한다.

시각이 이미 쓰고 있는 트릭
트록슬러 소실 — 눈의 미세운동이 없으면 정지된 상은 몇 초 만에 지각에서 사라진다.
교차양상 가소성 — 시각을 잃으면 시각피질이 다른 감각 입력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들어갈 자리의 해부학
각막은 인체에서 감각신경 밀도가 가장 높은 표면 중 하나다.
접형동(코 뒤 빈 공간)은 시신경 교차부와 밀리미터 단위로 가깝고, 코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망막신경절세포 축삭의 약 10%는 외측슬상핵이 아니라 상구로 간다.
능동 전기위치측정 — 전기어가 자기 전기장의 왜곡으로 주변을 파악하는 방식.


이 글의 성격 — 이건 완성된 설계가 아니라 생각의 기록이다. 여기 적힌 것 대부분은 아직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고, 그래서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른다. 정답 하나로 좁히지 않은 것은 의도한 것이다. 좁히는 일은 앞의 질문들이 답을 준 다음에 할 일이다.

안승원 / Wonbrand / https://wonbran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