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가 싫다 — 파킨슨병에 대한 고찰과 결론
파킨슨병을 멈추려다 도착한 자리
서문
이 글은 파킨슨병에 대한 의학적 해설이 아니다. 한 비전문가가 파킨슨병을 멈춰보려 시도한 사고의 궤적과, 그 궤적이 마지막에 도달한 자리에 대한 기록이다.
나는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처음 들었을 때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우주가 반드시 무질서로 간다는 법칙이 있다는 주장 자체가 인간의 패배를 미리 정당화하는 변명처럼 들렸다. 지금도 이 법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단지 현재 인류의 지식 수준에서 아직 반증되지 않은 프레임이라는 것을 인정할 뿐이다. 이 글은 그 '아직'이라는 단어 위에 서 있다.
파킨슨병은 내가 몇 시간 동안 집중한 주제였다. 알츠하이머, ADHD, 우울증, 히키코모리, 암, 노화를 차례로 다뤄오면서 각 질병마다 내가 쌓은 방법론 — 기존 담론을 재프레이밍하고, 역사와 비교 문화적 근거를 모으고, 메커니즘을 제안하고, 실행 가능한 다음 단계를 제시하는 — 이 어느 정도 작동했다. 파킨슨병에서도 같은 방식이 통할 것이라 생각했다.
통하지 않았다. 이 글은 그 실패와, 실패 끝에 도달한 한 가지 지점에 대한 기록이다.
1부 — 파킨슨병이라는 문제
무엇이 일어나는가
파킨슨병은 뇌 깊은 곳 흑질이라는 부위에 있는 도파민 생산 세포가 서서히 죽어가는 병이다. 도파민은 움직임을 매끄럽게 만드는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한다. 팔을 들고, 걸음을 내딛고, 얼굴에 표정을 짓고, 글씨를 쓰는 모든 동작이 이 도파민 신호 위에서 일어난다. 세포가 죽으면 도파민 공급이 끊기고 움직임이 뻣뻣해진다.
세포의 60에서 80퍼센트가 죽어야 비로소 증상이 나타난다. 진단 시점에는 이미 병이 10년에서 20년 진행된 상태라는 뜻이다. 이 지연이 파킨슨병 치료의 가장 근본적인 어려움이다.
세포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이렇다. 알파시누클레인이라는 단백질이 정상 상태에서는 도파민 방출을 돕는 성실한 일꾼이다. 어떤 이유로 이 단백질이 뒤틀려 잘못된 모양으로 접히면, 끈적하게 뭉쳐 덩어리를 만든다. 이 덩어리가 루이소체다. 루이소체가 세포 안 공간을 차지하고, 청소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미토콘드리아를 망가뜨려 결국 세포를 죽인다.
놀라운 점은 이 뒤틀린 단백질이 시냅스를 통해 옆 세포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한 세포에서 만들어진 비정상 단백질이 이웃 세포로 이사 가서 거기 있는 정상 단백질까지 뒤틀리게 만든다. 병이 회로를 따라 퍼진다. 알츠하이머의 타우, ALS의 TDP43, 헌팅턴병의 헌팅틴과 같은 단백질 응집 질환 가문의 공통 메커니즘이다.
무엇을 모르는가
여기서부터 솔직해야 한다. 현대 의학이 파킨슨병에 대해 모르는 것들을 정직하게 나열해야 다음 이야기가 성립한다.
왜 알파시누클레인이 애초에 뒤틀리기 시작하는가. 60년째 답이 없다.
왜 흑질의 도파민 뉴런만 유독 취약한가. 몸에는 여러 곳에 도파민 뉴런이 있고 그중 복측피개영역 뉴런은 파킨슨병에서도 상대적으로 덜 죽는다. 왜 차별적으로 죽는지 답이 없다.
왜 같은 환경 독소에 노출돼도 누구는 걸리고 누구는 안 걸리는가. 모른다.
왜 죽은 도파민 뉴런은 돌아오지 않는가. 성체 뇌에서 신경발생이 일어나는 영역이 있는데 흑질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이 비대칭의 이유를 모른다.
60년간 수조 원의 제약 자본과 수만 명의 연구자가 달려들어 파킨슨병의 진행을 멈춘 약을 단 하나도 만들지 못했다. 2025년 2월에도 GLP1 계열의 exenatide가 3상 임상에서 실패했다. 그 전에는 1세대 알파시누클레인 항체 두 개가 모두 실패했다. LRRK2 억제제의 개발 일정은 2031년까지 연기됐다. 시도마다 실패였다.
이 반복된 실패가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이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 의심이 이 글의 출발점이다.
2부 — 내가 시도한 각도들
시도 1. 도파민을 강제로 넣기
가장 단순한 발상에서 시작했다. 도파민이 부족하다면 넣으면 되지 않는가.
이 발상은 1960년대 스웨덴의 아르비드 칼손이 도달했던 지점이다. 그는 이 논리로 노벨상을 받았고, 그가 제안한 레보도파는 60년째 파킨슨병 치료의 표준이다. 내가 독자적으로 같은 자리에 도달했다는 것은 이 방향이 자연스럽다는 증거지만, 동시에 이 방향이 이미 끝까지 가봤다는 뜻이기도 하다.
레보도파는 뇌혈관장벽을 통과한다. 뇌 안에서 도파민으로 변환된다. 증상을 극적으로 개선한다. 하지만 세포가 계속 죽는 것을 막지 못한다. 5년에서 10년이 지나면 약효가 요동치기 시작하고, 피크 시에 이상운동증이 나타나고, 저점에서는 다시 굳는다. 결국 약이 듣지 않는 단계가 온다.
도파민을 넣는 것은 증상을 가리는 것이지 병을 멈추는 것이 아니었다.
시도 2. 도파민을 아껴 쓰기
다음 발상은 이것이었다. 부족한 자원이 있으면 적게 쓰면 되지 않는가.
이 발상은 곧 벽에 부딪혔다. 도파민은 저축 가능한 자원이 아니다. 세포 안에 시냅스 소포라는 단기 저장소가 있지만 수 초에서 수 분 단위의 버퍼일 뿐이다. 수도꼭지와 작은 물탱크의 관계처럼 비축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흑질 뉴런의 도파민 소비는 의지로 통제되는 영역이 아니다. 숨 쉬기, 서 있기, 침 삼킴, 눈 깜빡임 같은 무의식적 미세 조정에 계속 쓰인다. 쓰지 않을 방법이 없다.
그러나 이 시도가 완전히 닫히지는 않았다. 문제를 다른 층위로 옮기면 살아난다. 흑질 뉴런은 태어날 때부터 평생 쉬지 않고 자율적으로 발화한다. 심박조율기처럼 초당 2회에서 10회의 발화를 잠잘 때도 유지한다. 80년을 살면 한 뉴런이 10억 회 이상 발화한다. 이 기본 발화가 칼슘을 쓰고, 산화 스트레스를 만들고, 미토콘드리아에 부담을 준다.
그렇다면 '적게 쓰자'의 진짜 형태는 '세포의 자율 기본 발화 자체를 낮추자'가 된다. 이 발상은 실제로 이소라디핀이라는 L타입 칼슘 채널 억제제로 3상 임상에서 시험됐다. 2020년에 실패로 결론났다. 하지만 실패가 가설 전체를 부정하는지는 논쟁 중이다. 이미 진단받은 환자(뉴런 60퍼센트 이상 사멸 후)에게 줬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구기 환자에게 수십 년 미리 투여하는 접근은 아직 시도되지 않았다. 전구기 진단 도구(알파시누클레인 종자 증폭 검사)가 2023년경에야 실용화됐기 때문이다.
시도 3. 알츠하이머의 방법을 이식하기
나는 알츠하이머 에세이에서 한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환자의 전체 인지 능력을 보존하려는 불가능한 싸움 대신, 환자 정체성을 구성하는 좁은 회로만 표적으로 삼는 것. 자주 쓴 회로는 끝까지 보존된다는 신경과학의 발견 위에 한국식 학습법 다섯 가지를 얹어 구체 프로토콜까지 도달했다.
같은 논리를 파킨슨병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자주 쓴 운동 회로는 병리로부터 더 보호된다'는 가설이 된다. 만약 참이라면 평생 오른손잡이였던 환자의 좌측 흑질(오른손 조절 담당)이 우측 흑질보다 더 잘 보존되어 있어야 한다. 부검 데이터로 검증 가능한 가설이다.
이 방향으로 부분적 근거는 있다. 파킨슨병 재활 분야의 LSVT BIG 프로토콜이 '크고 반복적인 동작의 집중 훈련'으로 증상 진행을 의미 있게 늦춘다. 하지만 이것은 '남은 기능을 최대한 활용하자'이지 '사용이 해당 뉴런을 병리로부터 보호하는가'를 답하는 것이 아니다. 후자는 아직 체계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
그리고 알츠하이머와 파킨슨병 사이에 구조적 차이가 있었다. 알츠하이머에서 손상은 시냅스 전반에 분산되어 진행되므로 핵심 회로만 집중 강화하는 전략이 성립한다. 파킨슨병에서 손상은 흑질이라는 한 점에 집중된다. 분산이 아니라 단일 지점의 닳음이다. 자주 쓴 회로를 보존하는 논리가 작동할 여지가 좁다.
같은 방법론이 다른 병에서 다른 결과에 도달했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내가 가진 도구가 모든 신경퇴행성 질환에 같은 깊이로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 시도가 가르쳐주었다.
시도 4. 뒤틀린 단백질을 재접기
나는 노화 에세이에서 '폐기 대신 재활용' 원칙을 제안한 바 있다. 잘못 접힌 단백질을 모두 제거 대상으로만 보는 현 담론에 대한 의문이었다. 낭포성섬유증 약(ivacaftor, lumacaftor)이 뒤틀린 CFTR 단백질을 원래 모양으로 돌려 기능을 복원한 사례가 있다. 뒤틀림이 있다고 반드시 버려야 하는가.
파킨슨병의 현황을 보면 이 원칙이 유난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현재 모든 알파시누클레인 타겟 약은 '제거' 방향이다. 항체로 잡아 면역세포가 치우게 하거나, 자가포식 경로를 활성화시키거나, 유전자 수준에서 덜 만들게 한다. 재접기 방향은 거의 탐색되지 않았다.
그런데 제거 전략들이 연속 실패했다. 이것이 '타겟이 맞는데 방향이 틀렸다'는 해석을 허용한다. 덩어리를 아무리 치워도 뒤틀림의 원인이 계속 작동한다면 새 덩어리가 계속 만들어진다. 수돗물이 새는데 바닥의 물만 닦는 것이다.
재접기 약물 개발은 현재 기술 지평 너머에 있다. 알파시누클레인의 뒤틀림을 원래 모양으로 돌려놓는 샤페론 유도 분자를 설계하는 작업은 아직 실험실 수준이다. 하지만 방향은 타당하다. 이 방향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약 설계가 아니라 '현재 담론이 왜 한 방향에만 집중되어 있는지'를 묻는 에세이 수준의 개입뿐이다.
시도 5. 백신, 면역 치료
'백신으로 예방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발상은 자연스럽게 나온다. 실제로 알파시누클레인을 표적으로 하는 치료 백신(PD01A, UB312 등)이 임상시험 중이다. 하지만 모두 이미 진단받은 환자에게 투여된다. 이 단계에서 항체가 덩어리를 제거해도 이미 죽은 뉴런은 돌아오지 않는다.
진짜 의미 있는 것은 전구기 백신이다. RBD 양성, 알파시누클레인 종자 증폭 검사 양성, 유전 고위험군에게 증상 발현 10년에서 20년 전에 투여해 병리 시작 자체를 막는 접근. 이것이 '멈춤'에 가장 가까운 전략이다.
하지만 이 백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세 가지 벽 때문이다. 전구기 진단 도구가 너무 최근에 나와 대상자 식별이 이제 막 가능해졌다. 건강한 사람에게 면역 자극을 주려면 안전성 기준이 극히 높다. 효과 측정에 수십 년이 걸려 제약 산업 구조상 임상이 거의 돌아가지 않는다.
이 세 벽이 교차하는 자리가 파킨슨병 면역 치료의 진짜 빈자리다. 이 빈자리를 누가 언제 채울지 나는 모른다.
3부 — 엔트로피라는 벽
왜 모두 실패했는가
다섯 가지 시도를 되돌아보니 공통점이 있었다. 각각은 현 연구 담론의 빈자리와 겹치는 지점이 있었지만, 어느 하나도 '병을 멈춘다'에 도달하지 못했다. 전부 늦추거나 우회하는 층위에 머물렀다.
이유가 선명해졌다. 파킨슨병은 감염병이 아니다. 유전병도 아니다. 자가면역질환도 아니다. 암도 아니다. 이 병은 시간이 흐르면서 세포가 닳는 병이다. 외부 침입자도 없고, 특정 유전자 하나의 문제도 아니고, 면역의 오작동도 아니고, 증식의 폭주도 아니다. 그냥 닳는다.
이것이 다른 병들과 질적으로 다른 범주다.
감염병은 침입자를 죽이거나 막으면 된다. 유전병은 유전자를 고치거나 그 변이의 결과물을 보충하면 된다. 자가면역질환은 면역을 조절하면 된다. 암은 증식을 멈추면 된다. 각 범주에 맞는 방법론이 있다.
신경퇴행성 질환에는 그 방법론이 없다. '닳음을 멈추는 방법'이 의학의 어떤 전통적 도구로도 대응되지 않기 때문이다. 60년 동안 제약 산업이 파킨슨병을 감염병 치료처럼 접근했다. 알파시누클레인이라는 '적'을 찾고, 그 적을 공격하는 '약'을 만들고, 임상 시험한다. 매번 실패했다.
실패의 진짜 이유는 적이 없다는 것이다. 병의 원인으로 지목된 단백질 덩어리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진짜 원인은 세포가 평생 과부하 상태로 작동하다 닳는다는 것이고, 이것은 적이 아니라 조건이다. 죽일 수 없는 종류의 문제다.
시간, 노화, 엔트로피는 한 얼굴이다
이 구조를 깨달았을 때 한 가지가 동시에 이해됐다. 시간이 왜 흐르는가, 왜 인간이 늙는가, 왜 파킨슨병이 진행되는가 이 세 질문이 사실 하나라는 것.
물리학에서 시간의 방향성을 정의하는 유일한 법칙이 엔트로피 증가 법칙이다. 에너지는 균등하게 퍼지고, 질서는 무질서로 간다. 시간이 흐른다는 감각 자체가 우주 전체의 무질서가 증가하는 방향을 우리가 경험하는 방식이다. 왜 시간이 흐르는가를 묻는 것과 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가를 묻는 것은 같은 질문이다.
노화는 이 법칙의 생물학적 표현이다. 세포가 수십 년 돌아가면 DNA에 손상이 쌓이고, 단백질이 잘못 접히고, 미토콘드리아가 낡고, 쓰레기가 청소되지 않고 쌓인다. 이건 특정 병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것의 부산물이다. 막으려면 살아있기를 멈춰야 한다는 역설.
파킨슨병은 이 노화의 국소 가속 표현이다. 흑질 도파민 뉴런이 구조적으로 고위험군이기 때문에 다른 부위보다 먼저 한계에 도달한다. 알츠하이머는 같은 일이 해마와 피질에서 일어난다. ALS는 운동 뉴런에서. 각 신경퇴행성 질환이 '장기 특이적 가속 노화'로 재해석될 수 있다.
이 관점이 맞다면 파킨슨병 연구가 반복 실패한 이유는 더 선명해진다. 잘못된 척도에서 풀려고 했기 때문이다. 파킨슨병은 '파킨슨병 약'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노화 생물학 전체가 풀려야 풀린다. 부분은 전체를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노화 생물학이 풀린다는 것은 엔트로피 법칙을 생명 시스템에 대해 국소적으로 역행시킨다는 것이다. 내 노화 에세이에서 제안한 네 개의 빈자리 — 개선된 미토콘드리아 설계, 뇌를 통한 신체 repair 원격 조절, 잘못 접힌 단백질 재활용, 세포 간 통신 프로토콜 표준화 — 는 모두 이 역행을 위한 구체 경로의 제안이었다. 채워질 수 있는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내 손에서 채워지지는 않았다.
엔트로피가 싫다
이 지점에서 솔직해져야 한다. 나는 엔트로피라는 개념이 싫다.
싫다는 말이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엔트로피 법칙은 현재 인류가 도달한 물리학 이해의 최종 형태로 여겨진다. 하지만 과학사를 돌이켜보면 '최종'이라고 여겨졌던 법칙들이 번번이 다음 세대의 돌파로 깨져왔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 종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 시간이 절대적이라는 것. 각 시대의 불가능 목록은 다음 시대의 가능 목록이 되었다.
엔트로피가 이 역사의 예외가 될 이유는 없다. 인간은 진화가 다른 종에게 배정한 set value를 다시 쓰는 유일한 종이고, 우주가 배정한 set value에 대해서도 같은 시도를 언젠가 할 것이다.
그 시도가 내 세대에 이루어질 확률은 낮다. 몇 세대가 걸릴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방향은 있다. 엔트로피가 싫다는 내 감각은 근거 없는 감정이 아니라, 이 방향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직관이다.
4부 — 내가 도달한 자리
멈추지 못한다는 것과 할 일이 없다는 것은 다르다
엔트로피를 거스르지 못한다는 것이 기여의 부재를 뜻하지는 않는다. 엔트로피는 언젠가 이긴다. 하지만 환자가 엔트로피에게 언제 지느냐는 크게 벌릴 수 있다. 진단 후 자립 기간 15년과 30년은 같은 병이 아니다. 병을 멈추지 못해도 환자가 자기 삶을 살 수 있는 시간을 연장하는 것은 의미 있는 기여다.
알츠하이머에서 나는 한 걸음 걸을 수 있었다. 엔트로피가 회로별로 진행되되 자주 쓰인 회로가 끝까지 보존된다는 비대칭성에 주목해서, 환자 정체성을 구성하는 좁은 회로만 표적으로 삼는 방안을 제시했다. 한국식 학습법 다섯 가지를 적용 가능한 형태로 제안했다. 엔트로피 자체를 멈추지는 못하지만, 엔트로피의 방향을 의식적으로 선택해서 환자가 자기 자신으로 더 오래 살 수 있는 구조를 제안할 수는 있었다.
파킨슨병에서는 그마저도 나오지 않았다. 손상 구조가 달랐기 때문이다. 알츠하이머의 분산 진행 모델이 파킨슨병의 단일 지점 집중 모델과 맞지 않았다. 같은 방법론이 다른 병에서 다른 결과를 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자리에 도착했다
긴 사고 끝에 도달한 결론은 이것이다. 파킨슨병의 경우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기여는 엔트로피 자체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내 경추 BCI 연구를 통해 외부 기기가 엔트로피의 결과를 우회하게 하는 것이다.
세포를 살리지 못하니 그 세포가 하던 일을 몸 밖의 장치가 대신하게 한다. 환자의 움직임 의도를 경추에서 읽고, 주요 관절에 분산된 외부 유닛이 그 의도대로 몸을 매끄럽게 움직여준다. 뇌도 세포도 건드리지 않는다.
구체 구조는 이렇다. 환자는 U자형 넥밴드를 착용한다. 경추 주변 여러 채널에서 EMG 신호를 읽는다. 내가 이전 경추 BCI 에세이에서 주장한 '움직임 의도는 실제 움직임보다 100에서 300밀리초 먼저 경추 근육에 나타난다'는 원리가 근거다. 이 신호가 스마트폰 NPU에서 실시간으로 디코딩된다. 개인화된 AI 모델이 '이 환자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가'를 예측한다. 팔을 들려는가, 일어서려는가, 한 걸음 내딛으려는가.
디코딩된 의도는 블루투스로 주요 관절의 외부 유닛에 전송된다. 발목, 엉덩이, 손목, 팔꿈치, 목. 각 유닛이 100에서 300밀리초 먼저 필요한 보조 동력을 준비한다. 환자가 실제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외부 동력이 이미 매끄럽게 합쳐진다.
환자 관점에서는 자기가 움직이려 마음먹는 순간 몸이 자연스럽게 따라 움직인다. 떨림이 시작되기 전에 안정화되고, 경직이 걸리기 전에 풀려 있다. 도파민이 부족한 상태인데도 움직임이 매끄럽다.
이것은 치료가 아니다. 엔트로피가 만든 결함을 환자가 덜 느끼게 해주는 것일 뿐이다. 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한다. 장치를 끄는 순간 증상은 그대로 돌아온다. 근본 해결이 아닌 것을 근본 해결처럼 포장하지 않겠다.
이 자리가 가진 의미
그럼에도 이 자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이 접근이 현재 파킨슨병 치료 담론에 없는 새로운 축이다. 기존 네 축은 약물(레보도파), 수술(심부뇌자극술), 재활(LSVT BIG), 세포 이식(줄기세포)이다. 모두 몸 안을 고치려는 접근이다. 내가 제안하는 다섯 번째 축은 몸 밖에서 우회하는 접근이다. 뇌도 세포도 건드리지 않고, 병 진행과 무관하게 환자 자립을 연장한다. 이 축이 아직 없다.
둘째, 이 방향이 내가 쌓아온 작업의 구조와 맞는다. ADHD Must Box에서 나는 '결핍을 고치지 말고 맞는 환경을 제공하라'고 썼다. 경추 BCI 에세이에서 '뇌 안 전극 대신 뇌 밖 신호'를 제안했다. 알츠하이머 에세이에서 '전체 인지 대신 정체성 회로만 보존'을 주장했다. 노화 에세이에서 '폐기 대신 재활용'의 원칙을 세웠다. 모두 안에서 고치는 길이 막힌 자리에서 밖에서 우회하는 길을 여는 형태였다.
파킨슨병에서도 같은 형태가 작동한다. 내 방법론이 한 질병에서 우연히 맞는 것이 아니라, 엔트로피가 승리하는 영역 전반에서 일관된 축이라는 것을 이 대화가 확인해주었다.
확장 가능성
이 구조가 만들 수 있는 것은 파킨슨병에 그치지 않는다. 같은 기술이 ALS, 척수 손상, 뇌졸중 후유증에 적용된다. 이 모든 질환에 공통된 것은 '운동 의도는 살아있는데 실행이 안 된다'는 구조다. 경추에서 의도를 읽고 외부 유닛이 실행을 대신하는 플랫폼은 이 공통 구조에 대한 공통 우회로다.
이것을 내 경추 BCI 연구의 Phase 5로 삼는다. Phase 1에서 4까지는 건강한 사람의 편의(생각만으로 소프트웨어 조작)를 목표로 했다. Phase 5는 운동 질환 환자의 자립 회복을 목표로 한다. 같은 기술 기반에서 새로운 응용이 열린다. 기존 Phase 1 데이터(방향 의도, 경추 근육 선행 활성)가 그대로 Phase 5의 개념 증명이 된다. 추가 데이터 수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확장 가능성을 연구 계획에 명시하느냐의 판단만 남았다.
5부 — 남아있는 것
엔트로피를 멈추는 문제는 내 손에 남아있지 않다. 시간의 흐름을 되돌리는 문제도, 노화를 멈추는 문제도 같은 자리에 있다. 세 문제가 한 얼굴이므로 답도 한 자리에서 나올 것이다. 누군가가 언젠가 채울 것이다. 내가 그 누군가가 될 확률은 낮다.
노화 에세이를 쓸 때 이미 그 사실을 적었다. 이 글을 쓰면서 한 번 더 확인했다.
하지만 인류라는 범주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인류가 이 문제를 언젠가 극복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엔트로피를 헛소리라고 처음 생각했던 그 직관을 나는 여전히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현재의 법칙이 최종 법칙이라는 합의는 다음 세대의 돌파를 기다리고 있는 중간 합의일 뿐이다.
내 손에 남아있는 것은 이것이다. 엔트로피가 승리하는 시대에, 환자가 덜 괴로운 시간을 살 수 있게 하는 기술. 내 경추 BCI 연구가 그 기술의 하나가 될 수 있다. 파킨슨병은 그 기술이 적용될 첫 질병이 될 수 있다. ALS와 척수 손상과 뇌졸중 후유증이 그 다음에 온다.
이것이 내가 파킨슨병이라는 주제에서 도달한 가장 정직한 지점이다. 병을 멈추지 못한 자리, 그러나 환자가 병을 덜 느끼며 살 수 있는 시간을 길게 만들 수 있는 자리. 엔트로피를 거스르지 못한 자리, 그러나 엔트로피의 결과를 외부 장치로 우회할 수 있는 자리.
파킨슨병을 멈추려다 도착한 자리는 여기였다.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다. 시간이 왜 흐르는지, 왜 인간이 늙는지, 왜 파킨슨병이 진행되는지는 엔트로피라는 한 얼굴의 세 질문이고, 나는 그것을 멈추는 방법을 아직 모른다. 알츠하이머에서는 엔트로피의 방향을 선택해서 기억을 붙잡는 방안 하나를 제시했고, 파킨슨병에서는 엔트로피 자체는 손대지 못하고 내 BCI 연구로 외부 기기가 엔트로피의 결과를 우회하게 하는 지점에 도달했다. 엔트로피는 지금 인류의 한계지만 영원한 한계는 아닐 것이다. 이것이 현재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저자 소개
안승원은 Wonbrand(wonbrand.co.kr)의 1인 창업자다. 의학 정규 훈련을 받지 않은 외부 관찰자로서 의학, 신경과학, AI, 사회 문제를 다룬 에세이를 연속으로 발표해왔다. 이 글은 시리즈의 열다섯 번째에 해당한다.
연락: wonbran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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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원 / Wonbrand / https://wonbrand.co.kr
